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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1)
진실된삶  2014-05-10 23:08:00, 조회 : 723, 추천 : 30

☞ 박근혜 행정부와 새누리당, 더 정확하게는 서남수 교육부장관과 박승춘 보훈처장, 그리고 뉴라이트교과서포럼에 의해 조직된 한국현대사학회가 찬양·칭송·미화하기 위해 왜곡·날조·은폐시키려 하는 18년 장기집권 박정희 독재권력의 어두운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김재홍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최신 저서《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 저자의 직접적 경험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친일파의 후예, 군사정변 세력이 조작한 잘못된 신화와 삐뚤어진 우상을 깨고 우리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다!







♣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이루어진 황태성 재판



중앙정보부의 발표는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정치 목적과 공작적인 냄새를 많이 풍긴 것이 사실이다. 황태성은 남한에 도착한 1961년 8월 말 이후 체포 시점인 10월 20일까지 사이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만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황태성은 당시 다른 제소자들에 의해서 신분이 알려졌다. 그리고 그들이 출소한 후 황태성 밀파 사건을 야당 인사들과 한국주둔 미국군 측에 제보했다.

그러자 야당은 국회에서 진상조사를 요구했고 한국주재 미국 CIA도 황태성을 인계해달라며 압력을 가했다. 중앙정보부는 그를 2주 동안 미국 측에 넘겨주어야 했다.

미국과 체결한 군사기밀협력협정을 내세운 요구인데다 또 군사원조와 식량원조라는 무기 앞에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CIA는 황태성에게 주로 박정희와의 친분관계를 캐물었다.

황태성은 일주일여나 아무 답변도 하지 않은 채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들은 험악하게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압박했다. 그러나 한국 중앙정보부나 CIA에서 고문은 없었다.

그래도 북한의 고위급 인사이기 때문에 간첩보다도 밀사로서 예우해준 셈이었다.



그해 12월 1일 황태성과 김민하, 조카딸 임미정의 남편 권상능이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구속 기소됐다. 채 한 달도 안 된 12월 27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는 황태성에게 사형, 권상능에게 15년 징역형, 김민하에게 10년 징역형을 각각 선고했다.

지나친 처벌이었다. 무엇보다도 남북 고위당국자 간의 대화를 위해 밀사로 온 황태성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북한에 대화거부를 선언한 셈이었다.

6·25동란 이후 그때까지는 남북 간에 대화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관계에서 최고실권자가 보낸 사신을 처형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선전포고로 간주되고 전쟁으로 돌입한다는 신호였다. 적국의 군인이라도 무장을 하지 않거나 포로로 잡히면 죽이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외교관 개념에 포함시킬 수 있는 밀사나 사신의 경우는 더욱 그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오랜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2심 재판 결과는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었다.

1962년 9월 육군고등군법회의 2심은 황태성에게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권상능은 2년 징역형, 김민하는 1년 6개월 징역형으로 형량을 대폭 낮추었다.

그러자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이에 불복하여 상고했고, 대법원이 법 적용을 잘못했다면서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파기 환송했다.

1963년 7월 상고심에서 황태성은 1심대로 사형, 김민하와 권상능은 2심의 징역형으로 확정됐다.



이제 황태성이 살아날 길은 국가수반의 감형이나 특별사면밖에 없었다.

그러나 1963년 9월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선거 유세가 시작되자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 후보의 좌익경력을 들추었다. 대통령 선거전에서 이른바 사상논쟁의 포문을 연 것이다.



민간 정치인들의 야당은 공명선거투쟁위원회 집회를 연달아 열어 “간첩 황태성이 공화당 사전조직 요원의 밀봉교육을 담당했다”며 공화당을 좌경집단으로 모는 전단을 대거 살포했다.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가 진화에 나섰다.



“황태성은 반미운동을 지령 받고 남하해 고위층과 접촉하려다 실패한 자다. 간첩 황이 박 의장과 만났다거나 친면이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일 뿐이다.”



♣ 젊은 날의 멘토 황태성도 박정희에겐 그저 ‘빨갱이고 간첩’



계속되는 야당 측 공세에 대해 박정희 후보 자신은 10월 10일 투표일 직전 유세를 위해 안동으로 가던 열차 안에서 직접 해명했다.



“황태성은 일제강점기부터 형과 친구였다.

그런데 해방 후에 보니 황은 빨갱이였고 그가 이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혁명을 일으켰던 해 9월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황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간첩으로 남하해온 것을 체포해왔다고 보고해왔다.”



박정희의 직접 해명도 야당 후보 진영의 공세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 다행스럽게도 국민여론을 의외로 무반응이었다. 사상논쟁이 오히려 윤보선 후보에게 역풍을 안겨주었다는 평가도 많았다.



1963년 12월 초순, 중정부장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사형이 확정된 황의 사형집행 승인서류를 내밀었다. 그때 박정희는 12월 17일 대통령 취임식을 일주일 여 앞둔 당선자 신분이었다.


황태성은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 심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는 일말의 감성이 움직였던지 망설였다.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형시켜야 하나?”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선거과정에서의 시비가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다고 판단한 김형욱은 강한 어조로 결단을 재촉했다.



“각하, 우리가 미국과 야당에 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사형을 집행해야 합니다.”



잠시 침묵하던 박정희는 체념한 듯 서류에 사인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12월 14일 토요일 오전 11시 20분, 인천 근교의 한 육군부대 안에서 황태성의 총살형이 집행됐다. 이례적으로 정부는 형 집행을 발표했다.


미국과 야당뿐 아니라 국민 보수층의 의심스러워하는 눈초리를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기 사흘 전이었다.



그 후에도 야당은 황태성의 오키나와 생존설을 제기해 이듬해인 1964년 정치쟁점으로 되살리고 끝내 국정감사로까지 몰아갔다.


국회 국정감사에선 문서와 사진 외에 입회한 군목과 기자의 증언까지 들었으나 미심쩍은 점이 있다는 소수의견을 남겼다. 1990년대 초 어느 주간지는 황태성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황태성 사건은 여러 가지 소회를 남겼다. 그는 남북대화의 역사에서 상대 체제에 의해 처형된 최고위급 인물이었다.


비록 공산주의자였지만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사업’을 위해 남하한 지식인으로서 어떤 간첩활동이나 파괴적인 폭력 활동도 하지 않은 밀사에게 극형을 가한 것은 비문명적이라는 지적을 낳았다. 2심 법정이 그에게 공소기각 판결을 내리기도 했지만 끝내 처형을 면하지 못한 것은 냉전체제의 비극이었다.



미국의 압력 때문이든, 야당 측 정치공세 때문이든, 박정희에게 황태성의 젊은 날의 존경하는 멘토였지만 이제 정치적 앞날을 생각할 때 “빨갱이고 간첩”일 뿐이었다.

더구나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 사건에서 풀려난 이후 급변하여 더욱 강경한 좌익 척결주의와 대북 대결주의의 길로 치달았다.



자신의 가족사에서 매우 깊은 관계였으며 젊은 날의 멘토였던 그를 특별사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태성의 죽음도 박정희의 변신이 가져온 비극 중 하나인 셈이다.

박정희의 통치 아래서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사법살인’을 당한《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과 인혁당 간부들을 비롯한 숱한 원혼들처럼…….



● 박정희 정권의 검은 거래 ‘독도밀약’



해마다 8월 29일 국치일이면, 야욕에 찬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국권을 빼앗긴 치욕을 생각하면 마음이 심란하다. 더욱이 갈수록 후퇴하는 한일관계 때문에 울분이 끓어오른다.

1백여년 전, 극악무도한 일제는 조선 왕궁에까지 자객을 보내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겁에 질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는 아관파천의 역사가 기록되기도 했다.

을사늑약과 대한제국 병탄 국치조약이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는 증거다.



한일관계는 갈수록 유감이 깊어지는 것 같다.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관계조약과 여러 협정들 때문에 더 그렇다. 그 후로도 계속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일본 각료들의 망언이 이어졌다. 역사교과서 왜곡도 이어졌다.



2011년 5월, 일본 극우파 의원 3명이 독도 인근 울릉도를 방문하겠다면서 인천공항에서 소란을 피웠다. 우리 나라 국민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더 화가 나게 하는 것은 우리 쪽 친일정권의 행태였다. 얼마 전 출판된 일본통 경제학자 노 다니엘의《독도밀약》이라는 책은 우리를 허탈하게 햇다.

독도밀약설이 어느새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1965년 1월 11일, 서울 성북동에 있던 어느 기업인의 자택 홈바.



당시 국무총리 정일권과 외무부차관 문덕주, 그리고 김종필의 친형으로 막후 밀사 중 한 사람인 김종락이 함께 있었다. 도쿄에서 날아온 우노 의원이 메모를 꺼내 읽었다.

그의 보스인 일본 자민당 실력자 고노 부총재의 자필 메모였다.



“첫째, 독도는 한국과 일본이 모두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며 서로 이의 반론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셋째,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하되 경비원 증강이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이 메모는 다음날로 대통령 박정희에게 재가를 받았다.

1961년 쿠데타 직후부터 군사정권의 수반으로서 한일회담을 시작한 박정희는 일제 군사학교 시절 은사와 군대 상관들의 지원과 조언에 크게 의존했다.



♣ 박정희, 일본 수상에 “미숙한 소생을 잘 지도해주십시오”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는 도쿄에서 이케다 시게루 일본 내각총리와 정상회담을 갖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유당 행정부처럼 많은 청구권 자금을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적 배상 등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배상 청구권을 포기하는 한일협정의 골격이 잡혀졌다.

정상회담에 이어 일본 정계 거물들이 한 자리에 모인 아카사카의 요정 ‘가와사키’ 오찬에서는 일본군 출신 박정희의 더욱 굴욕적인 태도가 드러났다.

박정희는 다다미 위에 양손을 짚고 유창한 일본어로 예의 바르게 일본식 인사를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미숙한 소생을 잘 지도해주십시오.”



그것은 비록 쿠데타 정권이지만 그래도 일국의 지도자가 취할 모습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박정희가 만주국군관학교 재학 때 교장이던 나구모 신이치로 예비역 중장도 동석했다. 나구모 장군은 박정희가 해마다 인삼을 보내주면서 예우해온 일본군 상관이자 은사였다.



5·16쿠데타 이전에는 우리 나라 정부가 일본의 식민지 수탈과 전범행위에 대한 징벌적 입장을 견지했다. 35년간의 식민통치로 인한 피해배상 요구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정통성을 갖지 못한 자신의 쿠데타 정권을 국제적으로 승인받는 것이 당면 목표였다.

또 냉전체제 아래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임을 인정받는 데 급급했다.



♣ 박정희 정권, 한일협정 대가로 검은 돈 6천 6백만 달러 챙겨



국내적으로도 정치적 기반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인 옛 선배와 상관들의 도움이 긴요했다. 검은 정치자금이 일본 쪽에서 대량으로 흘러 들어왔다.

공화당 창당자금을 만들기 위한 4대의혹사건 중 특히 파친코와 새나라자동차 수입허가 비리가 일본 쪽과의 검은 거래였다.

미국 중앙정보국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일본 기업들로부터 공화당 총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천 6백만 달러를 제공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계엄령과 1965년 위수령 아래서 한일협정을 강행했다.

1910년 국치조약을 일제가 강제했다면 1965년 한일협정은 친일군부정권이 국민저항을 봉쇄하고 만들어낸 강압의 산물이다.

그것이 박정희의 친일DNA 때문 아니냐는 점 때문에 국민들의 저항은 더 격렬했다.



더구나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으로 국민 개개인의 대일 피해배상 청구권마저 실효시켰다.

이것을 되살려내기 위해서도 한일협정은 전면 재검토돼야 하며 국민의 피해배상 제소운동도 벌여야 한다.

그러나 박정희의 친일DNA 때문에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을 바로잡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또 얼마나 큰 희생을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인가?



▶ 김재홍 著,『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동굴’ 속의 권력 ‘더러운 전쟁’」, (株)책으로보는세상 編, 2012년 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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